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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포 남유럽 제5탄] “ 스페인 발렌시아와 그라나다 옛 유적 감동”

◈ 이사벨라 여왕 어느 누구도 생각치 못한 큰일 들 실행

이영민 | 기사입력 2024/07/07 [11:47]

[로포 남유럽 제5탄] “ 스페인 발렌시아와 그라나다 옛 유적 감동”

◈ 이사벨라 여왕 어느 누구도 생각치 못한 큰일 들 실행

이영민 | 입력 : 2024/07/07 [11:47]

 

              멀리 수평선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쿠예라 해변 사진=이동우 특파원

 

▴쿠예라, 관개수로 이슬람 시대 건설

▴오랜지, , 올리브, 캐톱 등 생산

▴해안가 리조트 아파트 장관

1960년대부터 인구 급증 특급관광지 도약

▴그라나다 스페인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 알함브라 궁전 아름다움의 극치

 

               사진=관광객들이 알함브라 궁전을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구불구불 도로를 한참 가다 보니 멀리 산등선에 하얗게 CULLERA(쿠예라)라는 글씨가 백색 페인트 돌로 박혀있고 옆쪽으로 도로 끝에 고전적인 옛 성이 보인다.

그 성 밑으로 아름다운 주택들이 레고처럼 한참을 내리 쌓여 있고, 도로 건너로 제법 높은 레지던스 빌딩들이 지중해 코발트 빛 바닷가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거려 눈이 부시다. 쿠예라는 조그만 도시인데 스페인 발렌시아 자치 지역에 위치한 발렌시아 지방의 리베라바하 지역에 있는 지중해 해양 도시이다.

 

               사진= 자유분방한 관광객들의 모습,모두가 행복해 하고 있다.

 

발렌시아 자치 지역의 수도 발렌시아에서 30km 떨어져 있는데 후카르강의 물을 끌어대는 관개수로가 이슬람 시대에 건설됐다고 한다.남부에 레스타니 석호가 있으며 이 호수의 물은 마을 앞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건조하고 더운 지중해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이 17°C를 넘는다. 남부지방 어디든지 비슷하지만 이곳에도 오렌지와 같은 과일과 쌀, 올리브, 캐롭 등이 많이 생산된다.

 

마을 앞바다에 페녜타델모로라는 작은 섬이 있고, 북쪽으로는 산로렌소 석호도 있다. 특히, 이 지역의 장점은 길게 이어진 지중해 해안가이다.그 해안가를 따라 리조트와 아파트가 높게 들어섰고 이 지역 특산물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작은 부스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저 끝까지 연결되어 깨끗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 주민들은 더위를 피해 가족 단위로 빵 가게에서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마시고 먹으며 바다를 바라보면서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사진= 평화로운 쿠예라 시내 풍경이 정겹다 

, 소박하게 살고 있어서인지 주차 차량이 모두 소형차 일색이다. 자동적으로 우리나라 생산 차량이 얼마나 되는지 대충 헤아려 보니 5% 정도 될듯 하다. 코리아가 세계 곳곳에 이름을 새기고 있다. 쿠예라의 동쪽 끝은 라보세스산이다. 고도가 233m뿐 이지만 멀리서 보면 이 지역에서는 가장 높고 큰 그야말로 우뚝 위상이 돋보이는 산인데. 옛날에는 이산에 토끼가 많이 살았고 이들을 좇는 여우도 많이 살았다고 해서 라보세스(여우라는 뜻. 발렌시아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우를 보기 어렵지만 이 산 위에 이슬람 시대 감시탑이 있었으며 기독교인들도 뒤에 이를 사용했다. 20세기 들어서서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됐다고 한다.

 

               사진= 깔끔한 모습의 쿠예라 골목길 

 

이슬람 시대에는 코야-아에리아(높은 곳)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뒤에 쿠예라가 됐다고한다.

이슬람 시대에 관개 시스템이 건설되고 새로운 경작법이 도입되는 등 큰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었다.아라곤 왕국 하이메 1세가 1235년 쿠예라를 점령했으나 발렌시아를 함락시킨 1240년까지는 통치하지 못했다. 하이메 1세는 발 세얀과 맺은 협약에 따라 쿠예라의 이슬람 주민 재산을 보호하고 이들을 평화롭게 장악함으로써 아라곤의 영토를 넓혔다. 1247년 이슬람 주민들이 왕실 권력에 반항하면서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자 왕실이 이슬람 주민들을 축출해 이슬람시대가 종식됐다.

 

1550년 베르베르족 해적선이 쿠예라를 공격해 재산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납치했다. 이로 인해 커다란 소동이 벌어졌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이곳에는 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가 196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아름다운 해변과 날씨 덕분에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며 특급 관광지로 변모했다.

 

밤이라 해야할 지 낮이라 해야할 지 모를 지금 시간이 오후 2130.(9) 아직도 해가 서쪽 능선에 걸려있다. 아름다운 해안가 쪽으로 수영복 차림의 연인들이 멀리 보이고 호텔 가까이에는 아이들과 함께 모래 백사장에서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아직도 낮인 것 같다. 이곳 남부지방은 이렇게 해가 늦게 지니 보통 저녁 식사를 오후 9시 이후에 먹고 밤 12시까지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나오지 않는다. 12시 가까이 되어도 길거리에는 뛰어노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크고 간난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함께 미는 젊은 부부의 사랑 섞인 스페인어 발음이 곱다. 거리의 작은 부스에서는 모자.악세사리등을 파는 아주머니들의 물건 자랑이 언제 끝날지... 알수없고. 하나둘씩 드문드문 켜진 불빛 사이로 스페인 집시 노래인지 은은하게 들리는 모래 백사장에서는 남녀 한 쌍이 하얀 공을 공중에 띄웠다. 그림같은 바닷가 밤 풍경이다.

 

한껏 기대를 하며 도착한 그라나다는 스페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관광 도시 중에 하나다. 뿐만 아니라 학술이나 예술. 종교등 다양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온 도시라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그라나다 주의 수도이며 시에라네바다 산맥 북서쪽 사면에 있으며 다로 강과 헤닐 강이 도시를 끼고 흐른다. 그라나다 라는 이름은 스페인어의 '석류' 를 뜻하는 그라나다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석류는 이 지방의 주요 특산물이다.

 

시내에 도착한 아침 시간은 매우 조용하고 밝은 기운이 돋보인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당나귀가 교통수단 이었다고 하는데 이곳 저곳에서 퀴퀴한 말 냄새가 났지만 골목 골목 아름다운 가게들과 레스토랑이 많이 보인다. 관광객들이 많이 찿는 곳이라 그런지 큰 공중화장실도 있고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을 보니, 마치 우리나라 홍대거리 같다고 해야 할까? 오밀조밀한 광고판. 그리고 각종 포스터가 붙어있고 작은 카페와 장식품 가게들이 인상적이다. 아침 일찍 시간이라 가게들은 아직 문 연 곳은 없고 동네 골목마다 조깅 하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띈다. 이곳은 은퇴자들이 많이 산다고 하는데 날씨와 경치가 좋은 이유도 있겠지만 관광객과 어울리기 좋은 환경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라나다를 많이 찿는 이유중 하나가 이슬람과 카톨릭이 겹치면서 새로운 예술과 문화가 만들어진 한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그중 가장 으뜸은 이슬람 지배 시절 건설된 알함브라 궁전일 것이다. 가톨릭이 스페인의 정착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알함브라 궁전은 다른곳의 아랍 궁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카톨릭 지배로 바뀐 이사벨라 여왕 이후로 아름다운 이 궁전을 철거하거나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랍어로 붉은빛이라는 뜻의 알함브라는, 겉으로 보면 붉은빛이 도는 견고한 돌 조각을 쌓아 만든 밋밋하고 조금 평범한 궁전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건축 양식이나 화려한 장식도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큰 기대를 하고 온 관광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실망은 순식간에 어메이징으로 바뀐다. 이슬람 건축의 특징인 투박하고 평범한 껍질 속에 숨은 화려한 알맹이가 눈앞에 황홀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궁전 안으로 들어서면 아라야네스 정원이 맞이한다. 분수가 있는 전형적인 아랍식 실내 정원을 중심으로 천국에서의 휴식을 표현한 시원한 공간 구조, 아라베스크 무늬의 벽면 장식과 마치 보석을 박은 듯한 화려한 조각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준다.

 

사자의 정원으로 발길을 옮기면 열두 개의 사자상이 떠받치는 분수가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둥그렇게 등을 맞대고 있는 사자의 입에서는 연신 물줄기가 품어져 나온다. 그렇게 흘러내린 물줄기는 홈을 따라 정원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간다.물이 부족한 곳에 사는 아랍 사람들은 물에 대한 애착이 무척이나 강했다. 황량한 사막에서 어쩌다 발견되는 오아시스는 그들에게 꿈이자 희망이었다.그들은 오아시스에 대한 애착을 사자의 정원에 그대로 옮겨 담았다.

벽면마다 현란한 아라베스크식 서체로 신성한 꾸란의 글귀를 가득 새겨 그들의 꿈과 희망을 표현했다.도대체 어디 한 군데 눈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예술적인 작품성에 놀란다. 천년 전에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이런 궁전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요즘 우리는 간단한 셈법도 계산기 없으면 답을 찿지 못하고 두 세번 두드려야 맞을까 말까인데 어떻게 계산기 없이 어려운 미적분을 풀어 돌을 쌓고 깎았을까 이해가 잘 안된다.

 

서기 711년 이슬람 무어인들에게 정복된 그라나다는 이슬람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이슬람 문화가 생성 되었다. 나스르 왕조가 세운 이 궁전은 이슬람 건축의 걸작일 뿐 아니라 그라나다의 제1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한다. 이슬람 나스르왕조 기간 동안 문화.예술.교육.종교의 다양화등 모든 분야를 어우르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 발전시키는데 큰공이 있다. 그러다 1492년 카돌릭의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에 의해 정복한 그라나다는 후에 스페인 왕국에 통합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으로 콜럼버스와 이사벨라는 대양의 시대를 열수 있었고 세계를 바꾸고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큰 꿈을 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몇 번을 생각했지만 이사벨라 여왕은 어느 누구도 생각치 못한 큰일들을 실행했다는 것에 놀라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하고 섬세한 디테일로 향후를 계획하고 관리 했을까..

모두가 거절했고 반대했던 콜럼버스의 제안을 신하들 몰래 받아들여 오랜 시간 그 여정을 믿고 기다리며 기적 같은 일들을 해냈던 여장부의 포부를 이방인인 기자도 가슴 깊이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일을 할때 특별한 아이디어와 큰 관심은 계획하지 않은, 생각못하는 또다른 성과를 불러오게 되는데 그것은 큰 행운이며 축복이다. 이것은 나이와 성별 그리고 부와 가난이 관계없다. 하지만 그 기회는 아주 드물다. 기업가나 아티스트등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볼수있는 혜안을 가진자 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한다. 우리의 세종대왕이 그랬고 스페인의 이사벨라가 그러했으리라...눈을감고 모든것을 이땅에 뭍은 이사벨라의 그라시아는 풍경의 아름다움 보다 세상을 보고,읽고 계획하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더 크게 배울수 있어서 이번 여행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다음편에서는 고딕의 나라 포루투갈 리스본에서 더위와 장마에 지친 충청저널 구독자 여러분께 시원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스페인 그라시아에서 충청저널 특파원 이동우(idnbook@gmail.com)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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